soyoyu

강현주

내 삶의 속도

	1998년 12월 29일 내 삶의 속도 지난 주 내내 교통사고로 입원해 계신 시어머니 병실을 지키 다가 문득 일상적인 생활과 나의 전공인 디자인에 대해 생각 해보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다분히 이기적인 생각때문이었 는데 몇일간 병실을 지키면서 내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 았다. (아마도 간호하느라 바빴다면 이런저런 생각도 할 여유 가 없었겠지만 시어머니의 경과가 좋으셔서 그저 몇일간 말 그대로 병실을 지키다가 왔다.) 학교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있고, 번역 출판하기 로 한 책의 원고 정리도 해야 하고 교내 연구소에 제출할 논 문 마무리도 해야하는데다 방학하면 바로 시작해야겠다고 생 각했던 다음 학기 사이버 클래스 강좌 준비 등의 계획으로 머리 속은 온통 복잡한데 몸은 병실에 묶여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학기 중반쯤 나는 2학년 학생들에게 디자인 수업 중에 '내 삶의 속도'라는 주제로 우선 A4 1장 정도 분량의 글을 쓰고 그 내용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었다. '내 삶의 속도'라는 제목 이외에는 별다른 설명 이나 조건들을 붙이지 않았는데 학생들 중에는 그 과제를 내 준 이유가 학기 중반 들어 느슨해진 수업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 탓인지 반성문에 가까운 글을 쓰고 앞으 로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새마을 운동식 구호를 앞세운 포스터와 같은 이미지 작업을 한 학생도 있었고 전체적인 자 신의 삶의 방식과 삶의 자세들을 관조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학생들도 있었다. 사실 그때 학생들에게 그 과제를 내주었던 이유는 우리가 우 리 자신들의 삶을 수단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창조적인 정신 을 바탕으로 한 실험과 시도가 이루어져 할 강의실에서조차 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도구화하고 상업화하고 수단시 하 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한 것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병실에 앉아 일상적인 생활과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하던 나 는 문득 그때 학생들에게 내주었던 '내 삶의 속도'라는 과제 를 떠올렸다. 병실을 지키는 일이 내 삶의 속도를 더디게 하 는 브레이크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은 아닌지... 논문을 쓰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내 삶의 속도를 올리는 가속기이고, 집에서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혹은 병실을 지키고 하는 일은 내 삶의 속도를 더디게 하는 감속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더 빨리 가야 하는데 내 발목을 잡는 일들 때문에 더 빨리 달리고 있지 못 하다고 투정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들이 내 마음과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연 우 리는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평소 내가 늘 주장하는 것은 디자인 분야가 발전하려면 디자 인에 있어 일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삶과는 괴 리된 채 생산성 향상과 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디자인을 생각하는 것은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으며 그 어 떤 문화적인 정체성도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다. 디자인 산업은 있되 (진정한 의미에서의) 디자인은 부재한 상황, 문 화산업은 논의하되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는 부재한 상황, 이러한 것들이 한국적인 현실이라 비판해왔는데 나 역시 이 러한 한국적 현실의 축소판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 게 되었다. 병실에 있는 동안 만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시간과 공간 을 즐기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나는 왜 가지지 못하는 걸까? 내일 다시 전주 시댁에 갈 예 정이다. 1999년을 병원과 시댁을 오가며 맞을 것 같다.병실 을 지키며 할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남편은 나에게 노트북을 들고 가서 시어머니의 요리법을 담아보라고 권한다. 병실에서 우둑커니 무료해 하시는 시어머니와 요리책 디자인이나 해볼까?
	2004-04-23 12:3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