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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01.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비평적 글모음’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시리즈는 미국에서 1994년에 제1권이 처음 출판된 이후 제2권이 1997년에, 제3권이 1999년에, 제4권이 2002년에 그리고 제5권이 2007년에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제1권과 제2권이 「왜 디자이너는 생각하지 못하는가」라는 제목으로 1997년과 1998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책 내용보다도 원서의 제목과 다르게 붙여진 번역서의 제목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었다. 대체로 이 책의 출간을 환영하는 분위기이기는 했으나 디자인계 일각에서는 책 제목이 너무 선정적이며 디자이너들을 비하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번역서의 제목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원서의 내용이 미국과 유럽의 디자인 상황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디자이너들도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보다 성찰적이고 비평적인 태도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번역서의 도발적인 제목은 오히려 시의적절한 면이 있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그 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제3권이 번역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책의 제목은 제1권과 제2권의 번역서 제목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원제를 살려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3」이라고 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글을 담고 있던 제1권, 제2권과 달리 제3권은 190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발행된 각종 디자인 관련 간행물에 실렸던 글들 중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고전으로서 소개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네 명의 편집자들이 선별하여 실은 것이다. 제3권의 책 성격이 제1권, 제2권과 다르고 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는 시기가 십여 년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자인 이지원 교수가 「왜 디자이너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3」이라는 제목 대신에 원서의 제목에 충실한 제목을 붙인 것이겠지만 번역서 제목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덧붙이자면, 이제 한국 디자인계의 담론 수준도 ‘왜 디자이너는 생각하지 못하는가’와 같은 식의 원론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단계는 넘어섰기 때문에 영감을 주고 결의를 다지게 하는 일종의 선언적 화두로서가 아니라 분야의 고전을 차분하게 읽어가는 마음으로 이 책을 비로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자생적인 디자인 담론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어찌 되었든 지난 십여 년간 우리 디자인은 산업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그 규모와 영향력이 예전과 같은 속도로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소 위축된 측면이 있을지 몰라도 사회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실천에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부해진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과대평가일까.
02.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3」의 번역자인 이지원 교수가 책 출간을 앞두고 일종의 추천사, 즉 책에 대한 소개글을 써달라고 요청했을 때 처음에는 무척 망설였다. 왜냐하면 일반 저서도 아니고 번역서에 번역자가 아닌 제삼자가 소개글을 쓴다는 것이 다소 어색했고, 또 만약 그런 글이 필요하다면 과연 나 자신이 적합한 필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평소 이 책 시리즈가 제1권과 제2권만 번역되고 이후 나머지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상황을 무척 아쉽게 여기고 있던 터인 데다 이 책의 번역자인 이지원 교수와는 오래전에 수업으로 만난 인연도 있어 부끄럽지만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인하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전공에 재직 중인 본인은 1999년도에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출강하여 디자인 이론 강의를 했는데 그때 이지원 교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부 학생이었다. 당시 수업은 스티븐 헬러가 1998년에 출판한 「디자인 대화(원제: Design Dialogues)」라는 책을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수업의 결과물은 비록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학기말에 책 형식으로 제본되어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이 한글판 책의 편집과 디자인을 바로 이지원 교수가 담당했다. 책 작업 이전부터 이지원 교수는 수업 중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디자인 작업과 담론에 대해 진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남다른 문제의식을 보여 깊은 인상과 기억을 남겼다.
한동안 자주 연락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2년 반쯤 전에 이지원 교수로부터 최근 근황과 더불어 그가 동료와 함께 운영하는 웹 저널 ‘디자인읽기(http://www.designersreading.com)’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후 이 사이트를 자주 방문하여 글을 읽곤 했다. 2009년에 이지원 교수가 그의 첫 번역서인 「그래픽 디자인 이론: 그 사상의 흐름」을 출판했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그 책을 대학원 수업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2010년 1학기에 이지원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특강을 요청하였고, 이때 만나서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3」의 번역 출판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지원 교수의 첫 번째 번역서인 「그래픽 디자인 이론: 그 사상의 흐름」과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3」은 편집자와 출판사, 그리고 원서 출판 시기가 서로 다른 책이지만 디자인 역사 속에서 고전이라고 일컬을 만한 옛 글들을 찾아 원문 그대로 읽을 수 있게 한 책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1990년대부터 국내에서도 디자인 관련 서적들이 다양하게 많이 번역 출판되고 있지만 정작 1차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 고전 원문에 대한 소개는 아직 부족한 상태임을 생각해볼 때 이 두 권의 출판은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시리즈가 제5권까지 나오는 동안 변함없이 편집자로 참여하며 책 출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스티븐 헬러는 국내에서도 널리 잘 알려진 디자인 저술가이자 편집자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이지원 교수와 수업을 함께하면서 사용했던 교재가 바로 스티븐 헬러의 저서였고, 본인 역시 스티븐 헬러의 또 다른 저서인 「디자이너 세상을 읽고 문화를 움직인다 (원제: Design Literacy: Understanding Graphic Design)」를 2001년에 번역 출간한 경험이 있어 이번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3」의 출판은 남다른 느낌이 들게 한다. 1995년에 「1945년 이후의 디자인」이라는 번역서를 처음으로 출간하고서 그동안 개인적으로 또는 다른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몇 권의 책을 번역 출판해온 경험에 비추어볼 때, 번역 작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집중해야 하는 일인지 잘 아는 본인으로서는 이지원 교수가 디자이너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실하게 갖고 교육뿐만이 아니라, 디자인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동시에 이처럼 번역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반갑고 놀라울 뿐이다.
내 경우, 대학 시절과 이후 두 해 동안의 짧은 디자인 회사 생활 기간에는 디자인 작업을 했었지만 대학에 재직하면서 주로 디자인 역사와 이론 강의를 담당하며 교육하고 연구해왔을 뿐, 실무적인 차원에서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지원 교수는 디자인 이론과 실무라는 두 영역을 가로지르며 글쓰기 활동과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어 부러웠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모습을 지켜나가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여,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전문성을 심화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와 더불어 더욱 확장되고 풍부한 디자인 담론의 형성과 디자인 실천을 위해서 앞으로 이지원 교수가 디자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타 분야에서의 논의와 쟁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03.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시리즈가 제5권까지 나오는 동안 참여했던 편집자들은 스티븐 헬러와 마이클 베이루트를 비롯하여 윌리엄 드렌틀, DK 홀랜드, 제시카 헬펀드, 릭 포이너 등이다. 디자인 실무 현장에서 치열하게 활동 중인 디자이너들과 글쓰기를 통해 디자인 담론을 만들어가는 일을 주로 하는 디자인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책을 출판했다는 점에서 이 책 시리즈는 디자인의 현장성과 더불어 담론성을 함께 갖고 있다. 물론 그것이 일목요연하게 이론적으로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이 책의 특징은 디자인 분야가 가진 고유한 특성이자 한계이기도 한 발견적 문제해결(heuristic problem~solving) 방식의 장‧단점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스티븐 헬러와 마이클 베이르트, 제시카 헬펀드 그리고 릭 포이너가 함께 만든 제3권은 고전이라 추천된 글 앞부분에 그 글을 추천한 편집자의 글이 실려 있어 고전 원문 자체와 그 원문을 다시 찾아서 읽고 추천하는 1990년대 말 편집자의 디자인 인식이 겹쳐져 함께 읽히는 묘미가 있다. 거기에다가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시점까지 더해지면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나라에서의 디자인 인식들이 서로 공감하거나 때로는 부딪혀 충돌하며 여러 겹의 층위와 다양한 무늬들을 만들어낸다. 이 책은 편집자들이 190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약 90여 년간 미국과 유럽의 디자인 역사 속에 기록된 글들을 일정 기준을 가지고 선별하여 시대순으로 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54개나 되는 글들이 특별한 장 구분 없이 병렬로 나열되어 있어서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친절한 책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필립 B. 멕스나 리처드 홀리스의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를 읽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디자이너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글의 연도와 제목, 글쓴이가 표기된 책 목차를 보다가 문득 어느 시기의 글이 가장 많이 실렸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총 54개의 글 중 1920년대에 쓰인 글이 12개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1960년대로 11개였다. 편집자들이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1930년대 7개, 1940년대 5개, 1950년대 8개, 1970년대 7개의 글이 선택된 걸 보면 20세기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 1920년대와 1960년대가 상대적으로 무척 흥미로운 시절이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1920년대에 써진 글들에서 특징적인 것은 신 타이포그래피로 일컬어지는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의 형성 과정과 주요 쟁점들을 여러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60년대의 경우에는 현대 소비사회 속에서 전문 직종으로 자리 잡게 된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각과 반성, 전통적인 인쇄 기반의 그래픽 디자인이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으로 그 성격을 확대 조정해가는 과정 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책 전체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전후해 유럽의 아방가르드 디자인 논의가 미국에 전해져 점차 상업화되면서 광고나 아이덴티티 등 새로운 디자인 비즈니스를 개척해가는 과정과 그러한 시장 중심 디자인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대안적인 움직임이 나타나는 상황이 반영되어 있었다. 또한 필자 구성도 눈여겨봤는데 54개의 글이 총 47명의 필자에 의해 써졌고 대부분 각 필자별로 1개의 글이 실렸으나 W. A. 드위긴스, 라즐로 모호이 너지, 엘 리시츠키, 허버트 스펜서, 윌리엄 골든, 기 본지페, 켄 가랜드 등 7명은 각각 2개의 글이 실렸다. 이들은 모두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이기는 하지만 이 중 특히 W. A. 드위긴스와 윌리엄 골든의 경우 유럽보다는 특히 미국 디자인 역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디자이너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20세기 동안 그래픽 디자인 논의의 중심이 점차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당시 필자들이 쓴 생생한 글들을 통해 확인하면서 우리 디자인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도 새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 독일에서 바우하우스가 개교했던 1919년이 우리에게는 삼일운동이 있었던 해이고 그 당시의 유럽 디자인계 상황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을 뿐더러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같은 시기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디자인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못하더라도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디자인 교육과 디자인 산업이 시작된 시기부터라도 꼼꼼히 살피고 정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본다.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서구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이지원 교수를 비롯한 디자인계 여러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연구를 계속해야겠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 디자인 역사와 현장에 대한 정리와 비평 역시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픽 디자인 들여다보기 3」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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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22:2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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