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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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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디자인, 진화하는 일상의 사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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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디자인, 진화하는 일상의 사물들
01. 아이폰과 깻잎 통조림
6월 11일자 국내 주요 일간지에는 "아이폰4, 깻잎 통조림 표절?", “아이폰4, 우리나라 제품 디자인을 베꼈다?”, "깻잎을 찍으면 아이폰4는 너의 것" 등의 제목 아래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우리나라 깻잎 통조림을 손에 들고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나 아이폰4와 깻잎 통조림의 두께나 크기 등을 비교한 사진들이 실렸다.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는 이 기사들은 스티브 잡스가 6월 8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애플 월드와이드 개발자 콘퍼런스(WWDC)에서 아이폰4를 발표한 지 하루 만인 6월 9일에 국내 한 네티즌이 트위터에 아이폰4의 디자인이 샘표식품의 깻잎 통조림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올린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글은 곧바로 트위터, 개인 블로그,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고 스티브 잡스와 깻잎 통조림을 합성한 사진도 올라와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었다. 깻잎 통조림이 아이폰4 덕분에 갑자기 화제가 되자 제조사인 샘표식품은 발 빠르게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서 7월 11일까지 한 달간 깻잎 통조림 인증샷을 올리면 추첨을 통해 아이폰4와 반찬통조림세트를 선물한다는 홍보성 게릴라 이벤트를 열기로 했고 6월 11일자 신문기사들은 그 내용을 보도한 것이었다.
깻잎 통조림이 다른 통조림과 달리 납작한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제조사 관계자는 “전통 깻잎장아찌는 눕힌 깻잎을 켜켜이 쌓아 그 사이에 양념을 넣어 먹는 형태이기 때문에 원형 통조림 형태로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는데 그러한 이유로 만들어진 사각 통조림이 아이폰과 닮았다고 한 네티즌의 관찰력과 상상력은 기발하다. 네티즌들의 재치와 센스, 유머감각이 발휘되면서 벌어진 이 사건을 요즘 한창 유행인 소셜 네트워크 미디어 상에서 벌어진 재미난 해프닝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일상문화 속에서 디자인이 향유되는 방식을 생각해볼 때 이번 일은 꽤 흥미롭다. 오늘날 우리가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고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들과 이미지, 그리고 도시 디자인까지도 어쩌면 아이폰과 깻잎 통조림이 보여주는 상품 미학의 세계와 디자인 생태학 사이에서, 아니 그 차이 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서울시를 비롯한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추진해온 공공디자인사업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이 거리 간판 개선 작업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실제 각 결과물들의 성패여부를 떠나 도시 공간 속에 좋은 디자인(good design)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애플사의 아이폰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시각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고 어지럽게 난립되어 있어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개선의 대상이 된 기존의 거리 간판들은 디자이너의 시각에서 보자면 결코 좋은 디자인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동안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이유를 갖고 생겨난 것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그것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와 토양,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버내큘러 산물(vernacular object)로서의 고유한 특성과 생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깻잎 통조림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한편, 깻잎 통조림 제조사인 샘표식품이 자사 제품이 아이폰4와 비교되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대대적인 이벤트를 벌이고 홍보용 보도자료를 낸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하는 물건이 만들어지고 상품으로서 작동하는 시장 원리와 소비자 심리 메카니즘을 제때에 적극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제품의 품질과 서비스가 부가가치의 핵심요소라고 생각해왔지만, 최근에는 진정한 부가가치는 곧 고객경험이며 고객경험의 질에 따라 기업의 시장가치가 달라지고 이것이 곧 브랜드 가치의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기업들은 즐거움이나 친밀함, 아름다움, 멋진 느낌, 편안함 등 경험적인 차원을 강조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샘표식품의 이번 이벤트 역시 자사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을 증폭시켜 기업 및 제품 이미지 향상을 도모하려는 디자인 경영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험에 따라서 일상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취향, 문화적인 선호도와 구매 습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원자재 경제’, ‘상품 경제’, ‘서비스 경제’의 시대를 넘어서 ‘경험 경제’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하는 현시점의 대중소비사회의 모습이다. 이제 자본과 문화, 경제와 경험, 돈과 미학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어지럽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고 그 중심에 디자인이 있다.
아이폰이나 깻잎 통조림이나 둘 다 자본주의 생산시스템과 그에 따른 일련의 유통, 판매, 소비의 과정을 거쳐 우리 손에 전해지게 된 물건들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이폰처럼 생산 초기 단계에서부터, 아니 당초 발상과 기획 초창기 때부터 아예 디자인을 최우선으로 하여 만들어진 물건도 있고, 디자인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디자인이 제한된 역할만 한 채 만들어지는 물건도 있다. 과거에는 디자인을 강조한 제품들과 그렇지 않은 제품들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서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많은 제품들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만들어지는 추세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촉발된 기술 개발과 대량생산방식의 본격적인 도입,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미학을 표방하면서 역사에 등장한 디자인은 지난 세기동안 점차 사회적인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이제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만인의 교양이자 기업 경쟁력 향상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아이폰이 출시된 이후 휴대폰 시장의 판도가 스마트폰 중심으로 바뀌면서 ‘모바일 생태계’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데 이 말은 모바일 기술이 새로운 디지털 기반 경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미겠지만, 이 보다는 지난 세기동안 이미 제2의 자연으로 진화, 발전해온 인공물의 생태계가 모바일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그 시스템과 작동방식을 실시간으로 가속화, 가시화 시키면서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신경제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생태계에는 아이폰처럼 디자인적 사고와 고객경험을 중시하며 철저한 디자인 계획 하에 개발된 제품도 있고 포스트잇처럼 실수와 우연한 계기, 그리고 행운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제품도 있다. 그것이 물성을 가진 구체적인 사물이든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처럼 무형의 차원에서 서비스와 관계, 그리고 경험으로 존재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02. 포스트잇의 탄생
『상품의 탄생, 그리고 디자인 이야기Where stuff comes from』라는 책을 통해서 일상의 사물들이 디자인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으며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상품사회학, 소비인류학 차원에서 서술한 사회학자인 하비 몰로치(Harvey Molotch)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은 애플사의 제품들처럼 디자이너 중심의 창의적 발상과 철저한 기획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임시변통과 임기응변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을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포스트잇이다.
1960년대 3M사에서는 영구성을 구현할 강력 접착제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는데 한 과학자가 실수로 몇 번을 떼었다 붙여도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않고 접착력도 줄지 않는, 당시로서는 실패로 여겨진 이상한 접착제를 만들게 되었다. 그 후 몇 년이 흘러서 우연히 1970년대에 3M사에서 일하던 한 엔지니어가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면서 그 접착제를 종이에 입혀서 찬송가 책의 책갈피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찬송가 책을 다른 성가대원에게 빌려주었다가 되돌려 받았을 때 책 표지에 붙어 있던 책갈피에 메모가 적힌 것을 보고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포스트잇이라는 상품의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하비 몰로치는 이 사례를 들면서 그렇다면 과연 누가 포스트잇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강력 접착제를 만들려다 실패한 과학자인지, 실패한 접착제를 종이에 바른 성가대원 엔지니어인지, 그의 찬송가를 빌려가 첫 포스트잇 메모를 남긴 친구인지, 그도 아니면 이 제품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포스트잇을 대량생산하기로 결정을 한 3M사의 사장인지 물으며 몰로치는 포스트잇은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든, 즉 일상 속에서 탄생하고 진화해온 물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카이 나오키는 『디자인의 꼴』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진화해온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하여 소개했는데 이 책에는 카메라, 병, TV, 자전거, 향수병, 캐릭터, 레코드 플레이어, UFO, 전화, 자동차, 스포츠 슈즈, 라디오, 속옷, 오토바이, 로봇, 컴퓨터, 가정용 게임기, 장난감, 청바지, 의자, 탑, 손목시계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의 형태들이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떻게 발전해오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또한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건축, 디자인 분야 큐레이터인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 역시 이러한 점을 주목하여 『디자인, 일상의 경이』 라는 책을 통해 비누, 축구공, 성냥, 음료캔, 클립, 나사못, 부채, 거품기, 감자깎이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소한 물건들이 탄생하게 된 이유와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물건들이야말로 디자인 예술의 진정한 걸작으로 칭송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역설했다. 디자이너인 후카자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은 『수퍼 노멀: 평범한 속에 숨겨진 감동Super Normal』이라는 제목의 전시회와 책을 통해서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사용해오면서 너무나 친숙해져 버려서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평범한 물건들이 갖고 있는 디자인적 가치와 힘을 드러내고자 했다.
03. 의미 있는 사물
미국의 경제전문지인 『포춘Fortune』 지가 2010년 올해의 IT 최고의 CEO로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를, 그리고 IT 업계 최고의 디자이너로 역시 애플사의 부사장이자 아이폰 디자이너인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를 선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애플사의 제품들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디자인 아이콘임에 틀림없지만 하비 몰로치나 사카이 나오키, 파올라 안토넬리, 그리고 후카자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이 주목한 것처럼 우리가 평소 일상생활에서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 역시 그것이 과연 어떻게 탄생하여 어떤 방식으로 진화되어 왔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뜻밖에도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물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흔히 사물을 실용적인 것이나 아름다운 것, 필수품이나 헛된 사치품으로 여긴다. 반면 사물을 정서적인 삶의 동반자라든가 상념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제로 생각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 의미 있는 사물(evocative objects)이라는 개념은 이런 두 개의 낯선 접근법을 합한 것으로 우리와 사물 사이에서 생각과 느낌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물들을 통해 어떤 생각을 떠올린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사물들을 사랑한다.'
위의 인용문은 MIT공대에서 과학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는 셰리 터클(Sherry Turkle)이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Evocative Objects: Things we think with』이라는 책을 펴내며 쓴 글인데 이 말은 “사람들은 대부분 디자인을 겉포장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와 거리가 멀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의 중심에 있는 영혼이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과도 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셰리 터클은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물에 영혼을 불어 넣어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디자인은 비가시적인 생각과 느낌만이 아니라 특정한 형태와 색, 재질과 두께 등 조형적인 특성을 갖는 시각적인 것이기도 하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리드 칼리지를 자퇴한 후 그 대학에서 서체와 관련한 강의를 청강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저는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의 차이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글자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여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의 디자인 경험을 말했다. 그 수업을 청강한 후 십년 쯤 지나서 잡스는 자신의 첫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었고 그 후 그가 만든 제품들은 단지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의미 있는 사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카자와 신이치가 꿈꾸었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즉 사랑과 경제가 하나로 융합되는 전체성의 운동을 실현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다는 의미일까? 애플이라고 하는 성공적인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아쉽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경험 경제’ 시대에는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예전과 달리 너무나 쉽게 경제 활동으로, 돈의 문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생활과 소비의 구분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정한 스펙을 갖춘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며 스스로를 조형하고 계발하고자 하는, 『디자인 멜랑콜리아』의 저자인 서동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자인하는 자아’로 거듭나기를 요구받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다만 이렇게 노골적이고 암울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사물의 생태계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 나름의 시스템과 질서를 만들어 가면서 우리에게 영혼을 지닌 의미 있는 사물들을 계속 선사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환경 변화에 적응하거나 때로는 도전하면서 일상 사물의 생태계가 디자인과 더불어 더욱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진화되어 가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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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6 20:2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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