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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주

디자이너란 무엇인가_서평

	모든 책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사연을 갖고 있지만, 특히 어떤 책들은 어떤 독자와 언제쯤, 어떤 형식으로, 어떤 이의 손을 거쳐서 세상에 나오고 싶은지 알고 있고 그 시기마저도 스스로 정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노먼 포터(Norman Potter, 1923-95)가 1968년에 집필하여 1969년에 출판한 <디자이너란 무엇인가What is a designer>가 로빈 킨로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개정판(1980, 1989, 2002)이 나오고, 또 그 책이 최성민에 의해서 스펙터 프레스의 유령 총서 시리즈 제1권으로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것 역시 나의 이런 공상을 더 부추긴다. 킨로스가 분명 "1968년의 책“이라고 했던 <디자이너란 무엇인가>가 68혁명이 일어난 지 꼭 40주년이 되는 해에,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 사이인 2008년 3월에 한국에서 출판이 되었으니 얼마나 절묘한 시점인가. 번역자가 이 책을 꽤 오랫동안 아껴왔고 출판을 일찍부터 준비해왔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판의 출판 시기를 결정한 것은 최성민이 아니라 사물로서의 책, 그 자신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마가렛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가 막 집권 했던 1980년에 로빈 킨로스와 함께 이 책의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포터가 전지구적 자본화의 본격화라는 당대의 격변에 맞서 지속적인 현대 운동을 옹호하고 변호하려 애썼다면 양대 선거 이후에 급격하게 한국사회가 “진보의 게토화”를 향해 갈 것이냐 아니면 오히려 “진보가 풍부해지는” 계기를 맞을 것이냐를 놓고 엇갈린 전망이 나오는 2008년 봄 현재, 그동안 주로 문화 영역에서 활동해온 이 책의 번역자이자 디자이너이자 발행인인 최성민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그 역시 '최상의 디자인에는 명예로운 역사가 있다. 긍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사회적 ․ 개인적으로 책임감 있고, 조화를 추구하는 전통이다. 이런 노력의 큰 몫이 겉치레 경영술로 퇴보하고 말았다'는 포터의 지적에 공감하면서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스스로 자문해보고 있을 것 같다. 영국의 디자이너이자 목수, 시인, 교육자였던 노먼 포터는 20대였던 2차 세계 대전 말엽에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40대 초반에 교수로서 68혁명을 겪으며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해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를 탈고했다. 책에 실린 노먼 포터의 서문과 로빈 킨로스의 영어판 후기, 그리고 최성민의 한글판 옮긴이의 후기를 읽다보면 이들이 세대를 넘어, 국가를 넘어서 얼마나 촘촘하고 친밀하게 지적으로 교류하며 디자인의 가치에 대해서 서로 공감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포터는 책에서 디자이너는 "모든 부문에 익숙하되 한 부문에 통달"해야 한다는 브루스 아처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하이픈 프레스(Hypen Press)를 운영하는 로빈 킨로스나 스펙터 프레스를 운영하는 최성민이 바로 그러한 디자이너들이 아닌가 싶다. 최성민은 모더니즘(modernism)을 현대주의로, 모던 운동(modern movement)을 현대 운동으로 옮겼는데 이러한 용어의 선택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운동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숭배하거나 또는 지겨워하는, 편견이나 선입견에 가득찬 습관적 태도를 벗어버리고 현재적 의미에서 이 운동이 추구했던 정신과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실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슬기와 민이 작업한 한글판의 북 디자인은 세심하게 용어를 선택하고 번역이 잘 되어서 매끄럽게 읽히는 본문의 유려한 문장들만큼이나 원서가 지닌 미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한국어와 영어라는 경계를 가뿐히 넘어서 원서와 번역서 간의 관계를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현대 운동의 기쁨과 진지함은 모두 꾸미기보다 드러내고 밝히기에 있었고, 이 가치는 현대주의의 임무와 유산에서 여전히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했던 포터 식의 현대 운동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포터 자신도 밝히고 있지만 내용적인 차원에서나 형식적인 차원에서, 또는 이론적인 차원에서나 실천적인 차원에서나 그야말로 "디자인 교과서"이다. 그리고 이 책은 초판이 출판된 지 40여 년이 된 오늘날에도 현재형으로 한국의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디자인의 고전이다. _ 강현주(인하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과 교수) * 월간디자인 2008년 5월호
	2008-04-25 10:48:27